일본 캄포의학 견학 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225회 작성일 16-07-15 14:58본문
1. 참가자의 간단한 소개글
장인수) 한의계의 이슈 대소사에 근거자료와 논문으로 맞서는 우석대 한의과대학 심계내과 교수. 보고 배울 것은 제대로 보자는 긍정의 마인드, 임상의와 학생들과 적극 교류하는 에너지 충전 임상교수.
송미덕) 한의약 융성기를 다시 보고 싶은 87학번 개원의. 한의사를 위한 임상아카데미 및 살롱 대표. 앞으로 변하게 될 의료 환경을 선도할 한의약에 관심이 많음.
조남훈) 관찰자, 기록 작성자 성향의 개원의. 원당경희한의원 원장. 한의사를 위한 임상아카데미 및 살롱 고문. 최선의 진료와 치료를 추구. 한의학의 과학화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
신선미) 세명대 한의과대학 신계내과학 전임교수. 내분비질환(비만, 대사증후군), 퇴행성질환 (놔혈관질환, 치매)을 주로 진료하고, 치료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의 가능성에 늘 고민하고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은 10년차 한의사.
이혁재) 민들레한의원 원장, 이해집단간 갈등으로 기초과학, 약학, 현대과학기술 의 지원을 받지못하는 한의학을 안타까와하는 약사출신 한의사. 한의약은 얼마나 유용성있게 질병을 치료하느냐에 가치를 두어야한다고 생각.
황만기) 아이누리 한방소아과 네트워크 공동설립자. 사회공동체에 의미있는 기여를 할수 있는 좋은 지식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세 아이의 아빠. 아이의 웃음과 아저씨의 미소를 동시에 발사하는 표정이 특징.
2. 2016. 6. 30~7.1 기타사토 연구소 병원, 쯔무라제약, 온지당 시수의원 견학
참가자 ; 장인수, 이혁재, 조남훈, 송미덕, 황만기, 신선미, 김홍준, 정민정, 강기완
우리나라의 제제약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사용되어야 좋을지 고민하던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쯔무라제약의 견학프로그램 시간이 정해지면서, 보고 싶었던 일본 의사의 한의진료에 대해 가까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의 한방에 관한 일면을 비교적 많이 접하게 되어, 참가자 모두는 이 의미있는 경험을 여러 제현과 함께 하고자 한다.
3. 방문 후기
3-1. 일본 한의학의 역사와 기타사토대학 동양의학연구소 방문을 통해 느낀 점
장인수
한중일 3국의 전통의학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사회 제도를 전면 근대화하면서 한의사 제도를 폐지하였다. 이후 일본 한방의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쳐오면서 다시 되살아났다. 그래서 오늘날 ‘和漢醫學’ ‘Kampo (漢方의 일본식 발음)’ ‘Traditional Japanese Medicine’ 등으로 불리고 있는 일본 한의학의 형태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1910년에 경술국치를 통한 일본의 식민지화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서 한의사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후 광복이 이루어지고, 1951년 부산에서 열린 제헌국회에서 ‘오인동지회’의 눈물겨운 노력 끝에 한의사 제도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반면 중국의 중의사제도는 20세기초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잘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필자의 비유에 따르자면, 일본 한방의학은 뿌리가 완전히 잘려나갔다가 다시 되살아난 경우이고, 한국은 반쯤 잘려나갔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중국은 단절을 경험한 적이 없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이 더해져 세 나라의 전통의학은 모두 제각기 다르다.
게다가 인위적인 제도의 변화 이전에 이미 오랜 시간을 거치며 각각 다르게 발전해왔기 때문에, 한 줄기에서 갈라져 나왔으나 한중일 한의학의 모습은 제각기 다르다. 때문에, 오늘날 세 나라의 한의사들이 서로를 쳐다보아도 어딘지 어색하며, “둘 다 우리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한의학은 중국의 한의서를 가져다가 공부하며 이어져오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들여온 활자와 인쇄술의 발달로, 에도시대(1597-1868)에 들어서면서 출판이 크게 융성하게 된다. 아울러 막부 통치에 의해 국가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의학도 발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의 중기부터 교토를 중심으로 腹診을 중시하고, 상한방을 위주로 하는 고방파(古方派)가 크게 융성하게 되고, 1700년대의 명의였던 吉益東洞을 비롯한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서 많은 저술이 나오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일본 한의학의 색깔이 강해지게 되었으나, 메이지유신 때 전통의학 의사제도를 폐지되면서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후 침은 침구사들에 의해서, 한약은 의사들에 의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의사였던 湯本求眞, 大塚敬節, 矢數道明 등의 3대 대가에 의해서 다시 일본 한의학이 부흥을 맞이하게 된다.
1972년에서 설립된 기타사토대학 연구소는 다시 살아난 일본 한의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숱한 한의서를 저술한 대가인 大塚敬節이 초대 소장을 맡았고, 矢數道明이 2대 소장을 맡게 된다. 이후 기타사토대학 연구소는 크게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1986년에는 일본내 최초로 WHO 전통의학연구소에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기타사토대학 동양의학연구소는 사실상 일본 한의학의 산실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장소이긴 하지만, 오늘날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의 한의사들의 눈에는 기타사토대학병원의 한 켠을 차지하는 작은 클리닉이나 센터로 보이기 때문에, 다소 실망스럽게 비쳐지기도 한다.
일본은 50년 전인 1976년부터 국가 의료보험에서 한약을 급여화 하였다. 또한, 2001년 일본 내 모든 의과대학에서 한의학 교육을 포함시켰으며, 2006년부터 동양의학전문의제도를 인정의에 포함시켰다. 현재 일본 의사들의 80% 이상이 한약을 처방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의사들이 한약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반면, 일본 의사들은 환자에게 ‘계지복령환’이나 ‘오령산’을 투여하는 일이 익숙하다는 뜻이다. 모든 의사들이 한의학적 치료 기술을 익히고 구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증, 복진, 맥진, 설진 등을 구사하며, 한의학적 진단, 치료 방법을 우선시하는 의사들도 만날 수 있다. 기타사토대학 연구소에서 출발한 근대 일본한의학의 모습은 일본 전체 의료계에 녹아들어가 있으며, 우리와 다른 형태로 제도를 정착시키고 발전해 온 것이다.
기타사토대학 동양의학연구소에서 우리를 맞이해준 오다쿠치 히로시 소장은 한의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계기에 대해서, 최신의 현대의학으로도 완벽하게 질병을 고쳐내지 못하는 현실을 느꼈고, 한의학 치료에서 더 나은 효과를 보게 되면서 한의학을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 한의학은 제도나 학술적인 내용 면에서도 한국 한의학에 비해서 분명히 다른 길을 어가고 있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한의학은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또다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서도 한국 한의학의 치료 기술을 높이고, 제도적으로 더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찾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다쿠치 소장의 억간산 설명
3-2. 기타사토 동양의학종합연구소 방문 후기
송미덕
도쿄의 외곽, 시나가와 역에서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간 일본의 보통 조용한 거리, 차량출입이 많지 않은 곳에 기타사토 동양의학 연구소가 있었다. 올 초에 본 중국의 부경중의과학원에 비하면 매우 작았다. 하지만 이곳은 일본 최대이자 최초의 동양의학 연구소이다, 1972년 설립되어 1986년 WHO전통의학 협력센터로 지정되었다. 진료 외 임상연구부, 의사학연구부, EBM센터도 있고, 연수생들의 한방교육과 대학원 강의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내부는 한국의 한방병원처럼 단정하고 차분했고, 접수대는 한방과 침구 두 가지로 나뉘어있고, 그 선택은 환자가 한다고 한다.
관계자와 함께 연구소 내 동양의학 자료전시실과 약재보관실을 돌아보고, 연구소와 진료현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자료전시실에는 희소서적과 화한약물이 소규모로 깔끔하게 전시되어있었다.
이곳의 진료는 12명의 각 전문과 출신의사가 한방(약)진료를 하고 -각자 꼭 전문분야만을 보지는 않는다-, 그중 한명은 침구진료를 하고 있다고 한다. 양방병원과 연계되어있고, 일본 제일의 통합의료를 목표로 하여 한방진료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한약은 의사가 처방이 가능하다. 제제약은 보험이 되지만, 첩약은 비보험이다. 침은 보험이 되지 않고, 침구사와 의사가 시술 가능하다. 비보험에 대한 비용은 한약 1개월에 23,596엔, 침구치료 1시간/1회에 7546엔으로 게시되어 있었다. 하루에 한약은 80여명, 침구는 40여명 정도의 환자를 본다고 한다.
내원하는 환자의 연령대는 남녀 공히 50대-70대가 65%정도를 차지하고, 30대가 10-15%, 그 이하는 매우 적고 소아는 1%정도다. 다빈도 내원의 통계자료는 그림과 같다. 남녀의 차이가 있으며, 피부질환, 정신증상, 부인과 증상, 자율신경실조증 등 한국에서처럼 매우 다양하였다.
침구치료는 스테인레스 침을 사용하여 경락을 자극하고, 중국고전을 기초로 일본은 독자적인 치료법을 쓴다고 한다.
일본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 중의 하나는 약재에 대한 관리인데, 규모는 작아도 쯔무라처럼 보관은 15℃, 습도 60%이하로 유지하며, 모든 사용약재는 잘게 파쇄하여 균일한 크기 (지름 약 7-8mm)의 음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약재의 수급은 80%가 중국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약을 관리하는 모든 사람은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약재를 맨손으로 만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이 연구소에서는 한약은 모두 약사 출신의 11명이 관리 조제한다고 한다. 보통은 1개월분을 하루 용량(약 30g)으로 기계로 담아 포장하고, 환자가 직접 40-50분정도 탕전하여 분복하도록 하고 있었다. 처방의 종류는 상한론처방에 국한되기보다는, 육미, 팔미, 보중익기탕, 계지복령환 등 고전적 처방과 억간산 같은 효능을 찾아가는 약 또한 선용되고 있었다.
이후 히로시 오다구치 소장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외과의사로서 한의학을 대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전체를 보는 한의의 특이성이 좋고, 진단이 되지 않는 증후군, 진단이 되어도 약이 없는 질환에 적용하기 좋다고 답하였다. 한방진료는 설진, 맥진과 복진 (복진패턴을 정형화)으로 하며, 음양, 허실, 기혈수의 구분을 하고, 현대의학적 판단을 겸한다고 한다. 예를들어 수면장애, 심하부통, 복직근긴장 등의 증상이 있으면 억간산을 처방한다는 처방도출의 공식이 있었다.
스테로이드 사용질환에 대해서는 의사마다의 개인 성향이 있지만 끊어나가도록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한 그는 특별히 한약을 처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보험이 되는 제제약보다
기타사토 진료소 상위 질환명
는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가감을 할 수 있는 장점 때문이라고 하였다.
EBM연구소는 전통의학시점을 반영한 임상연구를 하려하며, 임상연구소는 고서적과 문헌고찰후 동물실험을 통해 많은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미병체크, 예방목적의 진료를 하고있다고 한다.
히로시 오다구치 소장은 솔직한 일본의 의사로서의 한의를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일본한의학에 이론과 교재가 부족한 부분을 아쉬워하고, 자율신경과 관련한 질환에 한의가 강점이 있는 것 같다는 의견도 주었다. 많은 질문에 성실히 답해준 히로시 오타구치 소장과 연결해주신 조기호 교수님께 감사를 전한다.
일본의 몇몇 유명 한방진료를 보고나서, 첫째, 우리는 약재를 재배, 선별, 관리하는 부분에서 진정 약효를 위해 더 노력해야한다는 것, 둘째, 의무기록을 충실히 하고 학회를 통한 공유풍토를 일상화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쯔무라 같은 회사 2-3개만 있다면, 그리고 국가차원에서 한의를 키워보자라는 의지만 있다면, 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현대한의학이 일어설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3-3. 쯔무라 제약 방문기
조남훈
쯔무라 제약은 연간 '한약 제제' 매출액이 948억엔(한화로 약 1조 3404억원. 2007년 당시의 환율 기준)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한약 제제' 생산과 더불어 세계 1위의 '한약 제제' 가공 및 생산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다. 쯔무라 제약은 1893년 설립되었다.
쯔무라 제약사의 본사는 도쿄에 있고, 이바라키와 시주오카에 공장이 있고, 중국에서는 상해, 선진 등에 있다.
이번에 일본 도쿄의 북동쪽으로 40km즈음 떨어진 이바라키(茨城)현에 있는 공장을 방문했다. 이 공장은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세계 최대의 추출 한약(Kampo extract medicine) 공장'이다.
우리나라의 한의사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쯔무라 제약>은, 일본 한약 제제 시장에서 거의 90%에 육박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한 쿠도 카즈호씨는 일본인 중에도 가끔 있는 태음인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친절함과 성실함이 몸에 베어있는 느낌이었다.
이바라키 쯔무라 제약 공장은 박물관, 약재 창고, 실험실, 제제약 제조 공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약회사를 처음 견학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그동안 인식하지 못하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쯔무라 제약 공장 시설을 보면서, 자연스레 한의원의 약제실이 떠 올랐다. 그 큰 약재 창고를 미생물 번식을 막기 위해 온도 15도, 습도 60%를 유지한다고 했다. 약재를 최고의 상태로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가며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한약을 대하는 태도에 반성을 하게 되었다. 약재상이 가져온 약재를 그냥 공산품처럼 취급했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두 번째, 쯔무라 제약회사는 한약 제제의 효과, 안전성, 균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중국의 약제 산지와 직접 계약을 맺고 우수한 약재를 공급하고 있었다. 또한 한약 제제의 효과, 안전성, 균일성을 위해 매일 지표 성분 검사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약 제제의 효과를 현대 의학적 용어로 재해석하여 설명하고, 이를 논문화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식욕부진에 사용되는 육군자탕의 효과를 그릴렌으로 설명하는 안내문과 판넬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방문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알고 지내는 모 본초학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다소 안도가 되기도 했다. “한국도 이제 한약제제약 시설이 쯔무라에 버금간다. 실제로 우리나라 제약회사는 쯔무라를 모델로 공장 설계를 하였고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아무튼, 하루 빨리 한약제제가 첩약의 일어버린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한의사의 새로운 도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하게 된다.
위 그림은 쯔무라 제약사의 한약 제제약의 생산 과정 각 단계별 결과물
3-4. 쯔무라제약 방문기
신선미
2016년 7월 1일, 한국어가 능통한 쯔무라제약의 쿠도 가즈호 주임의 안내로 다소 습한 날씨의 동경에서 버스를 타고 약 2시간 가량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이바라키 공장이었다. 일본인 특유의 배려와 친절함이 묻어나는 현지 안내인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한방기념관부터 견학을 시작하였다.
1893년 창업한 쯔무라제약은 1964년 시즈오카(靜岡) 공장, 1983년 이바라키(茨城) 공장 그리고 2001년 중국 상하이 공장을 준공하여 한약을 생산하고 있고, 2016년 3월 31일 기준으로 1억 600만 달러(약 1조 1,606억원이 넘는 금액) 수익을 내었고, 이는 일본의 한방약 시장의 84.3%를 점유하는 수치이다. 1900년대 초반에 입욕제를 판매하던 회사는 현재 전국의 병원과 의원에서 처방되는 136품목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바라키 공장에서는 엑스 과립 33처방과 연고제 1처방을 생산하고 있으며, 연차적으로 공장의 생산량이 매년 7~8% 정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쯔무라 제약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한방약은 대건중탕으로 복부 수술 후의 복통 치료에 다용한다고 하며, 신경증, 불면증에 사용하는 억간산, 기력 증진을 위한 보중익기탕, 식욕부진에 사용되는 육군자탕 순이었다.
특히, 놀라웠던 점은 각 한방약의 치료 기전에 대한 연구 성과였다. 육군자탕의 식욕증진 기전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음식 섭취를 하게 하는 호르몬 “그렐린”이 어떤 원인에 의해 억제되는 것이 식욕저하에 관여하고 있다는 여겨지는데. 스트레스 등으로 식욕 제어에 관여하는 장내 세로토닌이 위에 존재하는 세로토닌 2b 수용체에 작용, 그렐린의 분비를 억제한다. 세로토닌은 시상하부의 세로토닌 2c 수용체에도 작용, 교감신경 원심로를 통해 위에서의 그렐린 분비를 억제, 식욕저하를 일으킨다. 육군자탕은 저하된 그렐린 분비를 회복시키고, 그렐린 수용체 신로를 증강시키는 2가지 기전을 통해 식욕저하 개선 효과를 보인다. 한방 복합 제제의 증상 개선 기전 효과 연구 성과에도 놀라웠지만, 의료인이 아닌 쯔무라제약 담당자의 차분하지만, 명쾌한 요점 설명에 연구 뿐만 아니라 대외 홍보 교육도 열심히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쯔무라는 해외의 약초 생산농가와 위탁재배계약을 맺어 최적의 원료생약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사용하는 본초의 80% 정도는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고, 중국 광둥(廣東)성의 선전(深川) 쯔무라에서 중국 내에서 수집한 생약 원료를 객관적이고 엄격한 기준으로 관리, 선별해서 합격한 제품만 일본의 공장으로 보내어 약을 제조하고 있다.
마트에서도 보는 채소, 육류들도 생산이력제라고 하여, 원료의 안전성과 제품의 질에 대해 철저히 공개하고 있는 시점에 쯔무라의 한약 원료 본초 관리는 실로 구태의연하게 생산되고 있는 한약제 유통 시스템 개선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였다.
그림 쯔무라 제약의 육군자탕의 식욕부진 개선 효과 기전 연구 결과 홍보물
한방기념관 다음에 방문한 곳은 약재 창고였다. ‘원료 생약 보관 조건’으로서 ‘온도 15도 이하-충 발생방지, 습도 60% 이하-곰팡이 발생방지’란 설명문이 붙어 있고, 꽤 서늘한 온도였다. 일행은 모두 실험복과 같은 복장으로 창고에 들어갔다. 총 4개의 약재 보관창고에 약재를 보관하는 가마가 쌓여 있다. 규격 가마를 사용하여 4단으로 정리하였고, 각 규격가마에는 바코드가 있어서 보관창고 천장의 컴퓨터 시스템을 통하여 자동으로 입고된 약재의 정보가 저장된다고 한다. 굉장히 큰 규모의 창고였는데, 하나의 창고에 보관된 약제를 1주일 이내에 소모된다고 하니, 한방약 생산의 규모와 자동화된 시스템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험실에선, HPLC 분석기기로 성분정량 시험을 하고 있었다. 국가 기준의 시험으로는 20% 정도 이하 밖에는 만족되지 않으므로 회사에서 더욱 엄격한 단독 관리기준을 만들어 사용한다며 자신 있게 관계자는 말하였다. 한약 원료의 위생과 유통의 안전관리는 한국도 중요하게 여기고, 제품에 대한 여러 검사를 하고 있지만, 쯔무라는 한약재의 재배, 구입 단계부터 직접 밀착관리를 하고 있었다.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 영양과 맛이 좋듯, 엄격한 재배와 관리를 통해 일정하게 약효가 유지될 수 있는 좋은 한약재가 좋은 한약을 만들고, 이런 기본에서 시작한 한약이 국민 보건 건강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첫 걸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동시에 멀리 떠나는 한국 방문객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던 쯔므라 제약의 관계자들을 보면 일본 특유의 꼼꼼함과 배려가 이런 튼튼한 기본의 바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3-5. 온지당 시수의원 방문기
이혁재
온지당 시수의원은 간판이 없었다. A4 용지 3장에 “온지당시수의원” 이라고 써서 출입구와 창문 3곳에 붙여서 간판대신 사용하고 있었다. 1층을 상가나 사무실로 사용하는 듯한 평범한 가정주택 비슷한 모습의 한의원이 인상적이었다.
동경의대를 나온 마취과 전문의가 하는 한의원이란 어떤 모습일까? 현대의학과 접목된 새로운 방식의 한방진료일까? 한의원에 엑스레이 혈액검사기 주사 등이 침, 한약과 접목된 형태일까? 이런 것들이 궁금했는데 막상 가서보니 우리네 한의원보다 훨씬 단촐한 구조와 의료기기(수은 혈압계정도만 눈에 띄었다.)를 갖추고 진료를 하고 있었다. 침을 놓지 않으니 침구실은 없고 접수실엔 텔레비전이나 차나 커피 같은 음료도도 없었다. 오직 진료실과 한약을 조제하기 위한 약제실 뿐이었다.
일하는 직원은 약사1명(한의원에 정식 약사가 근무하면서 조제한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간호사 2-3명 정도 근무하는 듯 했다. 약제실은 우리네 한의원처럼 엑기스제(일본에서는 140여가지의 엑기스제가 의사에 의해 처방되고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의료보험이 된다.
반면 우리나라 한의사는 50여 가지를 처방할 수 있을 뿐이며 품질 또한 열악하다.)와 한약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약재의 종류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약재들을 잘게 잘라서 자동분포기에 담아서 분포해주면 포장된 약재를 집에 가져가서 끓여먹는 구조였다. 우리처럼 끓여주는 것과는 장단점이 있어 보였다.
우리식의 탕약 장점은 우선 소비자가 먹기 편하고 선전 후하 등 특별한 탕전법이 필요한 탕제를 한의사 통제하에 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처방 후 조제에 일본식의 방법보다 시간이 걸려서 바로 환자가 가져갈 수 없고 택배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감기, 복통, 생리통 등 바로 약을 복용하기 원할 때에도 길게는 2-3일을 기다려야 할 수 있다. 한의사의 진료의 영역이 과거보다 좁아지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환자가 자신이 먹는 약을 잘게 잘린 형태라도 볼 수 있는 일본의 한약 조제법은 그 약재의 청결도와 종류를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있어 일본식 포장법의 장점인 듯하다.
우리나라의 한의원은 대개의 경우 한의사의 처방과 지시에 의해 간호조무사 또는 탕전 전담직원이 한약을 관리하고 달이게 되는데 방문했던 일본의 한방병원과 한의원은 일본의 약사(일본은 한의사 한약사가 없으므로 우리의 양약사)가 한약을 관리하고 조제하고 있었다. 분명 약을 관리하고 조제하는데 있어 간호조무사나 일반인이 하는 것 보다는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고 면허를 딴 약사가 하는 것이 더 신뢰가 가고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전체 진료에서 약보다 침 환자가 절대 우위를 점유하는 우리네 한의원에서 한의사가 일일이 약재를 관리하고 조제하고 달이는 것은 힘들지 않은가? 아직까지 한방의약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직역을 찾지 못한 한약사들이 배출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다시 고민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잊을만하면 기사화되는 한약재의 품질관리, 유통기한, 곰팡이, 중금속 문제 등은 한약의 품질관리 시스템에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한약의 품질관리, 제재화(엑기스가루약, 정제, 캡슐, 시럽) 임상실험 등의 짐을 한약사에게 넘기고 한의사는 진단과 처방, 치료에 집중하는게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좋지 않을까?
시수의원을 둘러보고 矢數芳英과의 면담 시간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한의사제도가 없어서 의사들이 자생적으로 한의학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들끼리 학회를 만들어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는 동경대학병원에서도 한방진료를 하는데 동료의사들로부터 양방으로 잘 낫지 않는 여러 통증, 난치질환들을 의뢰받아 진료한다는 것이다. 자주 접하게 되는 질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했으나 통계를 내보지 않아 알 수 없다고만 답변을 들었다. 동경의대라면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학병원에 해당하는 곳인데 우리나라보다 양방은 한수 앞선 일본의 국립의대에서 자연스럽게 양한방협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의 난치질환자들은 한약 먹으면 간독성으로 큰일 난다는 의사의 협박성 경고에 불안감을 감수하고 용기내어 한방진료를 받게 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실로 부러운 면이 많았다.
일본은 침구사제도가 따로 있어서 침은 주로 침술원에서 맞게 되는데 의료보험이 되지 않고 한번 침을 맞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3-4만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쯔무라제약을 안내했던 일본인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자신은 아직 침을 한번도 맞아보지 않았으며 침은 대중적인 치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은 한약엑기스보다는 침이 대중적이고 일본은 침보다는 한약엑기스가 대중적이다. 이 차이는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아마도 의료보험의 적용여부이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한약의 의료보험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엑기스제가 되었던 첩약이 되었던 보험제도로 편입되었으면 한다. 한의사가 지금과 같이 보험이 되는 침구치료만 하는 침구사로 전락해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일본 견학은 1박 2일의 짧은 여정에도 송미덕 원장님을 비롯한 우석대 교수님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꽉찬 일정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낄수 있었던 것 같다. 지면을 빌어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3-6. 유서 깊은 [온지당 시수의원(溫知堂 矢數醫院)] 방문기
황만기
[온지당 시수의원(溫知堂 矢數醫院)] 방문기를 작성하기 전에, 방문지와 연관되어지는 학부생 시절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잠깐 해보기로 한다.
벌써 19년 전의 일이다. 필자에게는, 한의과대학 재학 중이던 본과 2학년 초반(1997) 무렵부터, 예과 2학년 여름부터 오랫동안 사사를 했었던 존경하는 권순종 선생님의 추천으로, 저명한 일본한의학 전문서적들(예를들어, <약징>, <유취방>, <복증기람>, <복증기람익>, <한방입문강좌>, <한방의학 10강>, <증후에 의한 한방치료의 실제>, <황한의학>, <한방일관당의학> <한방치료백화> 등)을 한글번역본과 한문번역본으로 나름 열심히 한글자 한글자 정독을 하며 읽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크게 존경받을 만한 여러 저자분들 중에서도 <한방치료백화> 시리즈를 통해 수십년 동안의 한의학적 임상 기록을 매우 꼼꼼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겼던 고(故) ‘시수도명(矢數道明)’ 선생의 장인(匠人)적 면모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었는데, 이번 일본 여행을 통해서 그 분이 실제로 오랫동안 한방 진료를 수행했었던 현장인 [온지당 시수의원(溫知堂 矢數醫院)]을 직접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故) ‘시수도명(矢數道明)’ 선생(동경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의 양방 의사이자, 일본 한의학을 크게 발전 및 부흥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저명한 한방의학자로서, 기타사토(北里) 대학교 동양의학종합연구소 제 2대 소장이자, <한방치료백화(漢方治療百話)> 시리즈의 저자이기도 함)이 별세하시기 전까지 직접 진료하였었고, 그의 아들인 시수규당(矢數圭堂, 그 분 역시 동경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의 양방 의사이자 한방의학자) 선생이 (현재에도 가끔씩 원장으로서) 진료하고 있으며, 그의 손자인 부원장 시수방영(矢數芳英, 이 분 역시 동경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의 양방 마취과 전문의이자 한방의학자로서, 일주일에 2일은 동경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에서 정식으로 진료(한방진료)를 하고 있는 겸임교수임) 선생이 현재 주로 한방진료를 하고 있는 진료소이다.
병원 내의 휴게 공간에는, 고(故) ‘시수도명(矢數道明)’ 선생의 친형인 고(故) ‘시수격(矢數格)’ 선생(이 분도 사실 원래는 양방 의사였다. 그런데, 일본 대동아전쟁 참전 이후 거의 폐인이 될 정도의 질병을 얻어와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었었는데, 한의학적 치료(오적산(五積散) 복용)를 통해 생명을 건진 이후, 친동생인 시수도명 선생과 함께 한방의학으로 완전히 전향하여, 평생 동안 한의학 연구와 한의학 치료에 매진했음)과, 고(故) ‘삼도백(森道佰)’ 선생(일본식 체질의학의 선구자. 일본인의 체질을, 어혈증(瘀血證)/장독증(臟毒證)/해독증(解毒證)의 3개 체질로 분류하였고, 오적산(五積散) 처방을 통해 시수격 선생의 난치성 질병을 고쳤고, 시수격 선생에게 한의학을 가르쳤었던, 시수격 선생의 스승)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어서, [온지당 시수의원(溫知堂 矢數醫院)]의 학문적 뿌리를 짐작하게 했다.
병원 내부는 사실 생각보다는 별로 크지 않았고(오히려 약간 비좁다는 인상을 받았음), 설비는 매우 단촐했으며, 색상 역시 아주 소박해서, 담백한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병원 실내에서 상대적으로 큰 공간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약제실의 경우, 약 3~4명의 인원이 부지런히 한약(첩약도 있고 과립제도 있었음)을 조제하고 있었는데, ‘15일 단위’로 한약(첩약) 포장(우리나라처럼 탕전 기계로 달여서 나온 액체(한약추출액)가 담긴 파우치 형태가 아니라, 규격에 맞게 일정한 크기로 절단된 한약재를 혼합하여서, 환자가 스스로 하루 1첩을 집에서 달여 복용할 수 있도록 포장)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구가 눈에 띄였다.
특히 모든 방문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곳은, 지하 서고에 보관중이었던, 고(故) ‘시수도명(矢數道明)’ 선생이 남긴 ‘북 컬렉션’이었다.
서지학(書誌學)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판본의 많은 서적들(대략 천여권 전후)이, 고(故) ‘시수도명(矢數道明)’ 선생님의 공부 흔적들(빨간색 구둣점과 함께 책 위에 씌여진 정갈한 검은색 메모들)과 함께 조용히 방문객들을 반기고 있었는데, 우리와 같은 외부 방문객들이 손으로 그냥 막 만져도 되나 싶을 정도의 귀한 원본 서적(150~200여년전에 출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고서적들)을, 바로 몇 권(ex. 복증기람(腹證奇覽), 약징(藥徵) 등) 발견하고 펼쳐볼 수 있었다.
병원 구경을 모두 마치고, 방문자들이 궁금하게 생각했었던 5~6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시수방영(矢數芳英) 선생의 답변을 듣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었는데, 많이 바쁠텐데도 불구하고 시수방영(矢數芳英) 선생이 솔직하고 담백한 답변을 꽤 오랫동안 해주었다. 더군다나 우리 방문객들 전원에게 당신의 할아버님이신 고(故) ‘시수도명(矢數道明)’ 선생의 저서(한방치료백화(漢方治療百話)) 1권씩을 선물로 전해 주었다. 따뜻한 후의(厚意)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 1박 2일 동안의 단기 일본 방문(견학)은 참으로 알차고 보람된 일정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이 느끼고 배울 수 있었고, 뭔가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된 소중한 기회였던 것 같다.
이번 견학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정말 많이 수고해 주셨던, 송미덕 선배님과 장인수 교수님을 비롯한 모든 참가 한의사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첨부파일
- 일본 캄포의학 방문기.hwp (28.0M) 87회 다운로드 | DATE : 2016-07-15 14:58: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